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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투자은행(IB) 골드만삭스는 지난 21일 발표한 보고서를 통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중국 경제의 급성장이 멈춰 신흥시장에 대한 영향력이 급격히 감소했다"며 신흥시장이 중국과 디커플링(탈동조화)을 논의할 수준이 됐다고 지적했습니다. 지난 30여년간 이어져온 중국 경제의 급성장이 한국을 포함한 여타 신흥시장의 성장을 견인해온 압도적인 요인으로 작용했지만, 지금은 이 같은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심각한 경제위기 상황에 빠진 중국과는 이제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는 점을 에둘러 강조한 셈입니다.
골드만삭스의 지적처럼 중국 경제는 몇 년 전부터 소비·생산·투자 동반부진, 지방정부 부채 압력 증가, 최대 부동산 개발업체 헝다(恒大·에버그란데) 디폴트(채무불이행), 청년실업률 악화, 위안화 약세 등 이런저런 악재가 터져나오면서 많은 우려를 자아냈습니다. 특히 또다른 대형 부동산 개발업체인 비구이위안(碧桂園·컨트리가든)이 최근 디폴트 위기에 빠지면서 안그래도 어수선한 중국 부동산시장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중국 부동산 산업이 전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5%에 달하는 만큼 헝다에 이은 비구이위안의 연쇄 디폴트는 중국 경제에 대형 악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중국 경제에 심상찮은 경고등이 잇따라 켜지자 세계 각국도 긴장감을 늦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국 경제의 위기는 세계 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칩니다. 데이터 분석회사 엑샌티의 전략전문가인 앨릭스 이트러는 지난 17일 "20여년 간 중국의 경제 성장은 세계 경제의 중요한 동력이었다"며 "이는 중국 경제가 둔화하면 세계 경제의 성장도 늦춰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습니다. 지난 10일 유타주에서 열린 정치자금 모금행사에 참석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중국은 많은 경우에서 똑딱거리는 시한폭탄"이라고 비아냥댄 것은 이런 시각을 역설적으로 강조한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최근 국내 언론 매체와 주요 외신, 경제·금융기관들이 중국 경제위기와 관련해 '회색 코뿔소'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21일 중국의 경제매체 차이신이 자국 경제를 위협하는 초대형 변수로 떠오르고 있는 지방정부 부채 문제를 거론하며 "금융시스템의 위험에 접근하는 '회색 코뿔소'가 됐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회색 코뿔소는 국내 증권사 애널리스트 보고서에도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최유준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지난 18일 보고서에서 "중국 부동산 리스크는 '3대 회색 코뿔소 중 하나'"라고 적시해 눈길을 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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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중국 부동산 위기를 두고 회색 코뿔소라고 지칭하는 것은 이미 몇 년 전부터 헝다, 비구이위안 등이 빚잔치를 벌여온 것에 대해 경고등이 수 차례 울렸음에도 이를 간과하다 결국 디폴트 위기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역시 회색 코뿔소 발생 가능성을 일찌감치 인지하고 대비책 마련을 당부했다는 점입니다. 시 주석은 지난 2019년 1월 중국 공산당 중앙당교 세미나에서 "국제 정세가 예측하기 어렵고 주변 환경이 복잡·미묘하다"며 "검은 백조를 고도로 경계해야 하고 회색 코뿔소를 예방해야 한다"고 경고한 바 있습니다.
당시 시 주석이 회색 코뿔소와 함께 언급했던 '검은 백조' 역시 최근의 중국 경제위기와 관련해 자주 회자되는 용어입니다. 검은 백조는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뉴욕대 교수가 2007년 출간한 그의 저서 '블랙스완(Black Swan)'을 통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예언한 이후 유사한 경제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자주 쓰이고 있습니다. 검은 백조는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 현실에서 실제로 발생한 현상을 말합니다. 일어날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한번 발생하면 그 파급효과가 회색 코뿔소 못지 않게 엄청날 때 검은 백조를 언급하곤 합니다.
회색 코뿔소와 검은 백조는 흔히 경제위기와 관련해 비슷하면서도 구분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지만 정치·사회적 위기 상황을 언급할 때도 곧잘 쓰이곤 합니다. 이와 관련해 주식시장(증시) 상황이 어떤 흐름을 보이느냐에 따라 황소와 곰이라는 두 마리의 동물을 빗대 표현하고 있는 것도 흥미로운 점입니다. 금융권에서는 증시가 활황장세를 보일 때 황소가 뿔로 주가를 밀어올린다는 의미로 'Bull Market'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반대로 하락장이 이어지는 경우에는 하염없이 우하향하는 주가 그래프가 마치 두발로 일어선 곰이 앞발로 내리찍는 형상이라고 해서 'Bear Market'이라고 부릅니다.
현재 세계 증시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인상 기조를 오랜 기간 이어온 탓에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과거 농구스타 마이클 조던을 연상시키듯 잘 빠진 황소 한 마리가 구세주처럼 나타나 그 커다란 뿔로 세계 각국 증시를 후려치고 다니는 곰을 속시원하게 들이받아 버렸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