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강성학 칼럼] 권력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photo.asiatoday.co.kr/kn/view.php?key=20231220010012765

글자크기

닫기

 

승인 : 2023. 12. 20. 17:37

2023120601000639800033971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권력이란 마치 사랑처럼 제 눈에 안경이다. 권력이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은 권력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럴까? 한국인들 중에는 권력을 향해 날아드는 "불나비들"이 너무 많다. 그렇다면 권력의 속성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역사가 헨리 애덤스(Henry Adams)는 "권력이란 독약"이라고 개탄했다. 그러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권력이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자양분"이라고 생각했다. "권력이 곧 정의이다"라는 말은 그리스의 유명한 소피스트 트라시마쿠스(Thrasymachus)의 주장이었다. 우리 시대의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는 "권력이란 최음제"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나는 권력을 간단히 아편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권력이 아편이라면 그것은 천사 같은 진통제이며 동시에 악마 같은 지옥의 사자일 것이다. 알맞게 쓰면 고통을 완화시키는 데 탁월한 효능이 있지만 많이 사용하면 중독이 되어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리고 갈수록 더 많은 양의 마약이 고통 없는 삶을 위해 필요하게 된다. 그러다 마약 그 자체가 결국 죽음의 원인이 되어버린다. 바로 여기에 아이러니한 권력의 본질이 숨어있다. 그러나 권력은 인간이 단념하기엔 너무나 매력적이다. 이 뿐만 아니라, 모든 공동체의 삶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정치권력은 필요악이다. 정치권력은 질서를 위해 필요하고 질서는 평화를 의미하며 평화는 삶의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권력은 마치 히드라(Hydra)나 카멜레온과 같이 수많은 얼굴과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권력은 인간을 매혹시키거나 두렵게 만든다.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항상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기 때문에 우리의 시각에는 강렬한 감정과 도덕적 가책들이 흠뻑 배어들어 있다. 그리하여 권력은 마약인 동시에 정의로 간주될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마약도 아니고 정의도 아니다. 권력은 마치 불처럼 이중적인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처럼 아주 유용한 것이지만 또한 동시에 모든 것을 태우고 파괴할 수 있다. 권력은 "천국의 빛"인 동시에 "지옥의 화염"이다. 요컨대, 권력은 야누스의 두 얼굴(Janus-faced)을 갖고 있음이 분명하다.

성 오거스틴(St. Augustine)이 누군가 물어올 때까지 우리 모두는 "시간"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한 것처럼, 우리는 "권력"에 대해서 누군가 물어올 때까지는 이미 그것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권력의 이런 미묘함은 그것으로 하여금 마치 유령과 같은 속성을 갖도록 만든다. 그것은 항상 우리의 주변에 있지만 우리의 "오감"에 의해서 "파악되기"보다는 우리의 "육감"에 의해서 "감지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정의하는 데 끊임없는 어려움에 직면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나 사회집단이나 국가가 더 많은 권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구별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가 없다. 그것은 시간처럼 아주 추상적이지만 총살형 집행대(a firing squad)만큼이나 현실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학에서도 권력이란 가장 빈번히 사용되는 개념이지만 엄밀하게 정의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개념이다. 어떤 점에서 권력의 이러한 모호성은 그동안 시도된 모든 정의들을 마치 장님과 코끼리의 우화와 비슷하게 만든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동료 정치학자들에겐 참으로 미안한 얘기지만 "정치학(Politics)"은 "정치과학(Political Science)"이 결코 될 수 없는 것이다. 정치과학은 무지개를 쫓듯 허망한 일이다.

권력 개념의 모호성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인간행위와 정치에 관한 논의 속에서 매우 중대한 역할을 해왔다. 고대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권력이 내부적으로 어떻게 분배되어 있는가에 따라 정치체제를 분류했으며, 근대에서 마키아벨리는 권력을 잡고 그것을 지키는 방법을 군주들에게 가르쳤다.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는 권력에 대한 욕구가 인간행위의 근원이라고 설파했다. 몽테스키외(Montesquieu)의 가르침에 따른 미국헌법의 아버지 제임스 메디슨(James Madison)과 그의 동료들은 권력을 제한하고 분산시키는 헌법체계를 설계했으며, 기존의 모든 제도에 도전했던 칼 마르크스는 정치권력은 필연적으로 경제적 지배계급에 귀속된다고 주장했다. 일반 대중들도 권력이라는 개념을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했다. 많은 슬로건들이 '인민의 권력,' '흑인 권력,' '여성권력,' 학생권력,' '신의 전능한 권력' 등에서 그 용어에 의존한다. 정치학자들은 권력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는 설득력 있게 정치를 논의할 수 없다. 이 뿐만 아니라, 권력은 철학자나 역사가, 사회 이론가, 그리고 정치인들과 대중들이 항상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생각하는 정치적 언술이 남긴 용어이다.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이 질문했듯이,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이나 수완이 아니라면 무엇이 권력이란 말인가? 그러나 구체적으로 행사되지 않은 구조적 권력도 권력의 또 다른 얼굴이기 때문에 권력이 자신에게 귀속되어 있음을 입증하기 위해 항상, 또는 반드시 무엇인가를 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정치학의 아버지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찍이 정치학의 정밀성에 대해서 이미 경고했다: "모든 예술품이나 공예품에서 동일한 정확성이 기대되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철학의 모든 분야에서도 똑같은 정도의 정확성이 기대되어서는 안 된다." 비록 우리가 권력을 정확하게 정의하고 또 측정할 수는 없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권력은 확실히 존재한다. 권력이란 단지 연기(煙氣)가 아니라 진짜로 불이다. 따라서 우리는 측정 불가능한 요소가 있다고 해서 그것을 비실제적인 것이라고 버리는 중대한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 문학에서 "사랑"의 개념이 모호하다고 그것을 버리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짓이다.

모든 권력자는 인민들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염원이기 때문에 그는 권력을 이용하여 인민들을 지배하고 탄압하며 무조건 복종을 요구한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리고 그는 인민들의 복종을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착각하고 또 그렇게 항변한다. 바로 그런 권력자는 변명할 수 없는 폭군이다. 오늘날 북한의 김정은이야말로 이러한 폭군의 대표적 사례, 아니 세계의 유일한 세습 폭군이다. 그러나 모든 권력자도 인간이기에 결국은 죽는다. 아마 그 순간에는 그가 권력의 무상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모든 권력자는 권좌에서 사라져 그의 시대가 끝나면 사람들은 그가 행사한 권력의 공과에 대해 보다 자유로운 역사적 평가를 시작한다. 어떤 사람은 그의 공적만을 칭송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그의 허물에만 집중한다. 그러나 앞서 말한 권력의 본질적인 모호성과 양면성으로 모든 권력자는 공과를 동시에 갖게 된다. 권력은 공적을 위해 사용되지만 또한 동시에 사적인 욕망을 위해 사용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권력자에게 허물없이 공만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이 우리가 권력자를 평가할 때 반드시 명심해야 할 일이 아닐까?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