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묶인 채 칩거하는 남자 이야기
노르웨이 고전 간결하고 재밌게 풀어
종이로 만든 눈 내리는 연출 인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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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욘(John)'은 시종일관 채워지지 않는 욕망과 적막한 고독으로 가득하다. 가문의 명예 회복을 위해 아들에게 집착하는 어머니, 실패한 옛 사랑을 보상받고자 도리어 조카에게 소유욕을 보이는 이모 등 등장인물들은 모두 결핍과 외로움으로 지쳐 있다.
'근대극의 선구자' 노르웨이의 극작가 헨리크 입센(1828~1906)이 150년 전에 말하고자 한 욕망과 고독에 관한 주제는 영원히 반복되는 인간의 화두이기에 낯설지 않다. 이는 저출산·고령화·1인 가족 사회로 치닫는 오늘날의 현실 속에서 더욱 와 닿는 주제이기도 하다.
작품은 마치 막장 드라마처럼 인물들 간의 얽히고설킨 관계를 보여준다. 자신의 행복과 자유를 찾아 떠나려는 아들에게 집착해, 모든 이들이 그를 놓아주지 않으려 하는 장면에서는 웃음마저 터진다. 남들과 소통하지 못하는 고집불통 욘의 캐릭터는 한국의 가부장적인 아버지상과 겹쳐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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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백만장자가 될 수도 있었어! 내가 차지할 뻔 했던 그 광산들! 그 어마어마한 매장량! 수력발전소! 채석장들! 보르크만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돛단배들이 세계를 누빌 수도 있었어. 대륙에서 대륙을 연결하고! 그 모든 게 가능했어! 가능하게 할 수 있었다고!"
자신을 옮아 매던 과거의 영광과 그늘 속에서 벗어나 비로소 새 삶을 맞이하나 싶었지만, 욘은 끝내 세상과 결별한다. 젊은 날, 뜨겁게 사랑하고 또 배신하고, 끝없는 야망을 분출했던 그가 죽음을 맞는 순간, 객석은 그 허무함으로 숙연해진다.
구겨진 종이로 연출한 눈 내리는 장면이 눈길을 끈다. 연극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연출이다. 다만 작품의 말미에서 관객의 가슴을 좀 더 깊이 두드릴 수 있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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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욘'은 서울시극단의 올해 첫 작품이다. 봄날에 어울리지 않는 다소 어둡고 묵직한 주제를 다뤘지만 초연임에도 객석은 관객들로 가득 찼다. 서울시극단과 고선웅 연출, 이남희 배우 등 탄탄한 제작·출연진에 대한 기대 덕분인 듯하다. 특히 최고의 입센 전문가로 인정받는 김미혜 한양대 연극영화학과 교수가 이번 공연에 드라마트루기(공연 고문)로 참여해 작품의 질을 높였다.
공연 도중 울려 퍼진 핸드폰의 알람 소리가 잠깐이나마 몰입을 방해한 것은 아쉬운 점이었다. 핸드폰을 무음으로 해놓아도, 알람은 울린다는 점에 관객들이 주의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공연은 오는 21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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