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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현지시간) 로이터·AP통신 등에 따르면 하시나 총리는 전날 총리직을 사임하고 헬리콥터를 타고 방글라데시를 탈출해 인도로 피신했다. 같은 날 모함메드 샤하부딘 방글라데시 대통령은 전날 군부, 야당 지도자들과 긴급 회의를 연 뒤 즉각 과도정부를 구성하기로 했다. 또 제1야당인 방글라데시민족주의당(BNP)의 칼레다 지아 전 총리와 이번 시위 과정에서 체포된 이들도 전원 석방키로 했다.
반정부 시위를 이끈 대학생 지도부도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빈곤퇴치 운동가인 무함마드 유누스(84)와 논의 끝에 그가 과도정부 수반인 최고 고문(chief adviser)을 맡는 방안에 학생 지도부가 뜻을 같이했다고 밝혔다. 과도정부는 총선을 준비하게 된다.
인도로 피신한 하시나 전 총리는 영국 런던으로 향할 것으로 알려졌지만 블룸버그 통신은 영국과 인도 외무부는 이에 대한 언급을 거부하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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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나 전 총리는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이끈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의 장녀다. '봉고본두(뱅골의 친구)'로 불린 라흐만은 파키스탄으로부터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이끌어 내 건국의 아버지·국부(國父)로 추앙 받는다. 초대 대통령과 2대 총리를 지냈고 방글라데시의 4번째 대통령을 지내던 중 1975년 8월 15일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지아우르 라흐만에 의해 사망했다.
이 날 쿠데타를 일으킨 지아우르 라흐만과 군 장교들은 라흐만 대통령의 집에 난입, 라흐만 대통령 부부 등 일가족 18명을 살해했다. 하시나 전 총리는 동생과 함께 유럽에 있었던 탓에 목숨은 건졌지만 일가족들은 몰살됐다. 이후 하시나 전 총리는 수년간 영국과 인도 등지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1981년 방글라데시로 돌아와 정계에 입문했고 아와미연맹(AL)을 이끌었다.
군부에 맞서 민주화 투쟁을 벌인 하시나 전 총리는 군부에 의해 수 차례 투옥과 가택 연금을 당했다. 야당 세력을 규합해 자유총선 실시 등을 요구하는 투쟁을 벌인 하시나 전 총리는 1990년 군부 독재를 펼치던 후세인 무하마드 에르샤드를 권좌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하시나 전 총리는 이후 1996년 총선에서 승리, 40대 여성 총리에 올랐다. 다음 총선이었던 2001년 총선에선 패배했지만 이후 2009년 총선에 승리하며 재집권에 성공했고, 올해 초 총선까지 쭉 승리하며 4연임에 성공했다. 4연임으로 15년간 쭉 집권해 온 하시나 전 총리는 1996~2001년 총리 재임시기까지 포함하면 약 21년을 집권한 셈인데 이는 선출직 여성 지도자 가운데 가장 오래 권력을 잡은 경우다.
하시나 전 총리의 비극은 단발적으로 그치지 않았다. 군부에 맞서기 위해 1990년 야당세력을 규합할 당시 손을 잡아야 했던 야당 지도자 가운데는 자신의 일가족을 몰살했던 지아우르 라흐만의 부인, 칼레다 지아가 있었다. '국부'를 살해한 지아우르 라흐만은 이후 7대 대통령에 올랐지만 자신도 역시 6년 뒤 쿠데타로 목숨을 잃었다. 지아는 남편의 복수를 외치며 방글라데시민족주의당(BNP) 당수로 정치에 뛰어 들었다. 둘은 90년 손을 잡고 시민혁명을 성공시켰지만 이후 계속해 여당과 야당의 당수로 방글라데시 정계를 양분해 치열한 정쟁을 벌여왔다. 실제 자신의 생일이 아닌데도, 하시나 전 총리의 일가족이 몰살당한 8월 15일에 생일파티를 벌이는 지아의 일화는 유명하다.
남아시아 국제관계 전문가인 아비나시 팔리왈은 총선을 앞둔 지난 1월 "하시나는 정치인으로서 매우 강력한 자질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트라우마를 무기화하는 것"이라 평가한 바 있다. 비극으로 점철된 그의 정치적 인생이 전례 없는 권력 강화의 길을 모색하게끔 만든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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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를 몰아낸 민주화의 상징이었던 하시나 전 총리는 2009년 재집권에 성공한 이후 경제 발전에 초점을 맞춰왔다. 예전 방글라데시에선 상상할 수 없었던 외딴 마을까지 이어지는 전력망을 갖췄고 고속도로·철도·항구와 같은 대규모 인프라를 구축했다. 하시나 전 총리 집권 이후 방글라데시의 의류 산업은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산업으로 떠올랐다.
AP통신은 이같은 (경제)발전이 "여자아이들도 남자아이들과 동등하게 교육을 받게 되고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노동 인구에 합류하는 또 다른 발전을 촉발시켰다"고 평가했다. 이웃 미얀마에서 종교탄압과 '인종청소'를 피해 탈출한 이슬람계 소수민족 로힝야족을 보호한 것도 국제적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정치에선 민주화의 상징이었단 점이 무색하리만치 독재적인 통치가 이어졌다. 로이터통신은 하시나 전 총리의 통치가 "정치적 반대자들과 운동가들의 대대적인 체포·강제 실종·초법적 살인으로 특정지어졌다"며 인권단체들 역시 "사실상 아와미연맹의 일당통치"라 경고했다고 평가했다.
그의 강력한 정적이었던 지아 전 총리 역시 2018년 뇌물수수 혐의로 수감돼 정치활동이 금지됐다. 제1야당 BNP와 인권 단체들은 야당이 보이콧한 지난 1월 총선을 앞두고 하시나 행정부가 야당 단원 1만 여명을 말도 안되는 혐의로 체포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연료와 식량 수입 가격이 상승하며 경제가 급격히 둔화된 탓에 방글라데시는 지난해 국제통화기금(IMF)에 47억 달러(약 6조 4568억원) 상당의 구제금융을 받아야 했다. 경제적 혼란을 겪는 가운데, 안정적인 정부 일자리가 절실한 젊은이들에게 하시나 전 총리가 강행하려던 '공직할당제'는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
방글라데시에선 지난달 초부터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유공자 자녀에게 공직의 30%를 할당하겠단 공직할당제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유혈탄압으로 사상자가 속출하고 국민들의 분노가 커지는 가운데 하시나 전 총리는 이를 "야당과 테러리스트들의 음모"라 일축했다. 지난달 말 대법원이 기존 정부안 30%를 5%로 조정하는 중재안을 내놓고 상황이 잠시 안정되는듯 했지만 책임자 처벌과 시위 참가자 석방 등이 이뤄지지 않자 시위가 재개됐다. 결국 지난 4일에만 100명 가까이 숨지고 이번 사태로 모두 300여명이 목숨을 잃는 등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하자 하시나 전 총리는 결국 해외로 달아났다. 4연임에 성공한지 7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 국부의 딸·군부를 몰아낸 민주화의 상징이었던 그가 '독재자'로 불명예스럽게 퇴진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