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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헌법재판소는 7일 선거관리위원회의 전진당 해산 요청을 받아들여 "입헌군주제에 대한 위협"이라며 만장일치로 전진당 해산을 명령했다. 총리 후보였던 피타 림짜른랏 전(前) 당대표를 비롯한 지도부 11명도 향후 10년간 정계 진출이 금지됐다.
다만 전진당 소속 나머지 143명의 의원들은 60일 이내에 새로운 정당으로 적을 옮긴다면 의원직을 유지하게 된다. 전진당은 군소 정당인 틴까카오차오윌라이당(TKCV)으로 의원들의 당적을 옮기고 부대표인 시리깐야 딴사꾼 의원을 대표로 내세울 것으로 보인다.
이는 지난 2020년 역시 진보적인 의제를 내세웠다가 선거자금법 위반을 빌미로 해산된 전진당의 전신인 퓨처포워드당 해산 당시와 비슷하다. 전진당 소속 의원들이 모두 같은 당으로 옮기게 된다면 여전히 하원에서 가장 큰 정당이 되고, 왕실모독죄 개정을 제외한 군개혁·대기업 독점 체제 해체 등 당의 공약과 정책을 계속 추진할 수 있게 된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헌법재판소의 판결문 낭독을 지켜보던 네티즌들이 "정당을 해산시킬 권리는 국민에게 있다. 정당이 의미를 잃는 것은 국민이 선택하지 않을 때뿐이다"라거나 "선거를 통해 전달한 국민들의 뜻을 기득권 세력이 이렇게 막는다면 선거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여론이 속출하고 있다.
전진당의 해산으로 또 다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는 것이 아니냔 우려도 있지만 지도부 11명의 정치활동만 금지된 만큼 영향은 제한적일 것으로 보인다. 해산 판결 이전에 이미 기존의 보수적인 판결로 전진당 해산 전망이 더 컸던 탓에 "그다지 충격적인 결과는 아니다"라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전진당은 헌재의 해산 판결 이후 SNS의 계정명 '전진당'에서 '당'을 지운 후 '전진(Move Forwad)'만 남겨놓았다. 또 "깨지지 않는다, 죽지 않는다"며 "새로운 여행이 시작됐다. 함께 나아갑시다"는 내용의 게시물을 올렸다.
전진당은 지난해 5월 총선에서 왕실모독죄 개정 등 진보적이고 파격적인 의제를 내세우며 최다 의석을 획득, 제1당으로 올라서는 돌풍을 일으켰다. 하지만 당시 당대표였던 피타 후보가 왕당·보수파의 반대로 의회 총리 선출 투표를 통과하지 못해 집권에는 실패했다.
앞서 태국 헌법재판소는 지난 1월 왕실모독죄 개정 추진이 입헌군주제 전복 시도에 해당한다며 위헌 결정을 내리고 개정 추진을 철회할 것을 명령했다. 역시 "국왕이 국가의 원수인 태국의 통치 시스템을 훼손할 위험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전진당은 왕실모독죄 개정이 입헌군주제를 훼손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고 주장했으나 지난 1월과 7일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난 1월 헌재의 판결 당시에는 전진당 해산에 관련된 판결은 내리지 않아 곧바로 보수 진영 인사들의 청원이 이어졌다. 이에 지난 3월 태국 선관위가 전진당 해산 심판을 청구했다.
왕실모독죄로 불리는 태국 형법 112조는 왕과 왕비 등 왕실 구성원은 물론 왕가의 업적을 모독하거나 왕가에 대해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등의 경우 최고 징역 15년에 처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태국에서는 국왕과 왕실은 '불가침의 영역'으로 여겨진다.
태국 헌법재판소는 다음주에도 세타 타위신 총리 해임 청원에 대한 판결을 내릴 예정이다. 보수파 상원 의원 40명은 세타 총리가 과거 '뇌물 스캔들'로 징역형을 받은 피칫 추에반을 총리실 장관으로 임명한 것이 헌법에 위배된다며 총리 해임을 청원한 상태다. 피칫은 논란 이후 사임했으나 헌재는 해당 재판을 진행하기로 했다. 세타 총리도 위헌 판결로 총리직을 잃게 될 경우 새 총리 선출 등으로 인한 정국 혼란이 불가피하다. 일각에선 탁신 친나왓 전 총리 계열과 친군부 세력의 '정치적 동맹'에 균열이 간 것이란 우려도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