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하면 필자는 이전에도 연휴를 좋아하지 않았다. 배부른 소리로 들릴 게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니 방학이 보장돼 그런 말 한다는 핀잔을 듣기 딱 좋을 듯싶다. 틀린 말이 아니다. 선생이란 직업상 방학 기간 충전을 한다. 다음 학기 수업 준비를 하며 나름 바쁘게 시간을 보내지만, 일반 직장인들의 고된 일과와 업무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교수자의 처지에선 방학을 알차게 보내야만 이어진 학기에 수행해야 할 강의와 학업을 소화해 낼 수 있다. 그래서 연휴 기간이 부담스럽다. 방학 중에 준비한 수업 내용을, 일정한 호흡을 유지하며 끊어짐 없이 수강생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선 연휴는 일종의 변수로 버그일 수밖에 없다.
통상적으로 추석과 같은 긴 연휴가 낀 2학기는 1학기에 비해 버겁다. 오리엔테이션의 설렘과 본격적인 학기 초 수업의 긴장감을 유지할 필요가 있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한가위 여유는 학교로 돌아온 학생들의 학구열을 조금은 식게 한다. 이를 다시 북돋기 위해선 기존의 에너지에 두 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목소리 톤을 높이고 흥미를 다시 돋우기 위해 전략을 다시 세울 필요가 있다. 간단한 퀴즈를 낸다든가 재미있는 참고 자료를 제시해 토론을 시도해 본다든가, 학기 초 긴장감을 지속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한다. 그럼에도 궁극에 가선 휴강의 부담이 학기 말에 몰아친다. 기말 강의 보충 기간에 상대적으로 많은 양을 소화하기에 정체의 부담은 오롯이 교수자는 물론 학생들에게도 되돌아온다.
대학의 많은 교수자들이 교수법으로 나선형 교육모델을 차용하고 있다. 최근에는 온라인 게임과 같은 소프트웨어 개발에도 활용되는 모델이다. 진화적 프로세스 모델로도 불리는데, 최초 계획을 세우고 초기 욕구와 1차 위험 요인을 분석한다. 그리고 프로토타입을 개발하고 사용자 평가를 거쳐 수정을 가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정반합의 치열한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한다는 데 있다. 핵심적인 주제 또는 실현 가능한 플랜의 내재적 모순을 발견하기 위해 지양과 통일을 반복한다. 학습자에게 기존의 주장을 알려주고 토론을 통해 논리적 모순이 없는지 사유하게 한다. 다양한 주장이 난무하는 가운데 비교적 다수에게 공감을 얻는 새로운 해석이 나온다. 다시 사유를 통해 논리의 비약과 같은 요소를 수정한다. 새롭게 구성된 아이디어에 대해 처음과 같은 작업을 반복한다.
위와 같은 이상적인 모델을 일반적인 수업에서 시도하는 것은 한 학기를 통째로 날릴 수도 있는 모험이다. 그러나 적어도 토론 위주의 세미나 수업엔 적극 도입해 볼 가치가 있다. 어쨌든 어떤 경우든지 중간에 호흡이 끊어지면 곤란한 문제가 발생한다. 학습자들로 하여금 사유의 힘과 문제해결의 능력을 키우기 위해선, 점진적인 모든 단계를 와해해선 안 된다. 한편, 이 과정에서 흔히 하는 실수가 있다면, 반대의 논리를 구성하는 단계에서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엄연하게 지양의 과정은 본래의 테제에 내재한 모순을 파헤치는 수행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야 불변할 것 같은 것들에 크랙을 낼 수 있다. 이는 세계의 모순이 훤히 드러나게 하는 피를 토하는 알 깨는 과정이다. 그 수행의 과정은 돈오와 같이 일거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점진적이고도 지속적인 꿈틀거림이 수반되어야 하는 점수의 길이다.
뭐 거창한 말을 하는 게 아니다. 하나의 프로그램을 개발하는데도, 또는 일개 수업을 준비하고 운영하는 과정에도 나선형적으로 수행되는 지양과 통합의 과정을 반복해야만 일정한 성과를 이룬다는 말이다. 속담에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이 있으나, 이도 때가 있는 것이다. 일정한 시기에 일정한 공간으로 소를 몰아 안전하게 가두고 모든 준비가 갖춰졌을 때 쇠뿔을 빼는 것이 잠재적 위험을 제거하는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미래에 예상될 수 있는 위험 요소를 미연에 방지하기보다는 당장 지금 눈앞으로 소환하여, 기어이 헬 게이트를 열고 마는 어리석은 일이 돼버리고 만다.
밀고 당김 없이 밀어붙이는 작금의 정책으로 사달이 났다. 미래에 부족할 수 있는 공공의료를 개혁한다는 명분으로 현재의 의료체계를 붕괴시키고 있다. 내재적 모순이 무엇인지 논의해야 할 토론도 충분하지 않은 채, 과학적인 수치라고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이천이라는 숫자가 제시됐다. 그러나 지난 정권에서 논의되었던 공공의 확충을 위한 공공의대 신설과 10년간 한시적으로 매년 의대 정원 사백 명 증원부터, 의정이 갈등을 봉합하고 점진적으로 재논의해야 했다는 아쉬움이 크다. 내친김에 한 가지 더 말할 게 있다. 남과 북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김대중 대통령의 점진적 통일방안부터 다시 논의해야 한다. 현재 흡수를 전제로 한 통일을 말하는 폼이 왠지 전쟁이라도 한다는 말처럼 들리는 것은 기우인가?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미디어스쿨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