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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국제분업체제는 라틴아메리카에 수십 년간 경제적 번영을 가져다주었다. 아르헨티나가 세계 5대 부국의 반열에 오른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수출경제의 호황에 힘입어 수출경제의 주역이었던 소수의 대규모 농장주들은 지방과 중앙의 정치권력도 장악하고 있었다. 이를 두고 학자들은 농업과두체제(rural oligarchy)라고 부른다. 물론 일부 국가나 일부 지역에서는 광물이 주된 수출품인 경우도 있었지만 광물의 경우 채굴 설비를 수입하고 해안까지 철로를 부설하는 데 많은 자금이 들었기 때문에 외국인 투자가들이 주역인 경우가 많았다.
아무튼 이 시기에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같이 농산물이 주된 수출품이었던 일부 국가에서는 수출과 관련한 산업화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광산의 경우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주변 경제와 유리된 고립지(enclave)였다. 이뿐만 아니라 투자자가 대개의 경우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실현된 이익 또한 라틴아메리카로 환류하지 않았다. 반면 농업의 경우 필요한 투자가 비교적 작았기 때문에 대규모 플랜테이션도 거의 국내 자본가가 소유했다. 따라서 실현된 이익도 대부분 라틴아메리카 본국으로 환류했다. 대규모 농장주들이 이 이윤의 일부를 수출에 도움이 되는 운송, 보관, 가공, 냉동 등 관련 산업에 투자하면서 산업화가 태동했다.
산업화는 당연히 산업노동자의 출현도 가져왔다. 산업노동자의 적지 않은 부분은 아나코신디칼리즘에 노출된 남부 유럽, 특히 이탈리아 출신 노동자들이었다. 훗날 조직노동을 중요 축의 하나로 하는 포퓰리즘 운동과 정권이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이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인데 결코 우연이 아니다. 농업수출이 산업화를 가져오고 산업화와 더불어 조직노동이 태동했기 때문이다.
수출경제가 라틴아메리카에 호황을 가져왔지만 한두 개의 산품에 편중된 산업구조는 동시에 라틴아메리카의 경제의 균형 잡힌 발전을 가로막았다. 무엇보다도 산업화가 늦어지고 제조업이 발달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경제의 대외적인 취약성도 심각하게 증가시켰다. 라틴아메리카 각국의 경제는 스스로는 거의 통제 불가능한 국제산품시장의 부침에 좌우되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20세기에 접어들어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라틴아메리카의 '수출경제'는 1차세계대전을 전후하여 교역조건의 악화로 서서히 활력을 잃어 갔다. 공산품과 1차 산품 사이의 상대적 가격 차이가 증가하는 것은 어디에서나 나타나는 공통된 현상이지만 (이것을 경제학자들은 "협상 가격차"라고 부른다. Box 참조) 산업구조가 소수의 수출용 1차 산품 중심으로 짜인 라틴아메리카의 경우 그 부정적인 영향은 특히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라틴아메리카의 수출경제에 결정타를 날린 것은 세계대공황이었다. 1929년 미국 증시의 폭락으로 촉발된 대공황으로 라틴아메리카의 수출경제는 결정적인 위기를 맞게 된다. 공황에 빠진 구미의 선진국들이 수입을 줄이자 라틴아메리카의 수출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라틴아메리카의 수출은 양도 줄었지만 그보다도 가격이 폭락했다. 예컨대 브라질 커피의 수출 가격은 공황 시작 후 6개월 만에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당연히 그동안 수출경제체제하에서 경제력만이 아니라 정치력까지 독점해 온 농촌과두세력은 힘을 잃었고 새로운 정치경제체제에 대한 모색이 시작되었다. 수출경제와 농업과두체제의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수입대체산업화와 포퓰리즘(민중주의)체제였다.
◇협상가격차(鋏狀價格差)란?
선진국의 공업제품 가격은 상승하지만, 후진국의 1차산품 가격은 그만큼 오르지 못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후진국의 교역조건은 불리해진다. 또 선진국에서도 농산물가격에 비하여 비료·농업기계 등의 가격이 일반물가와 함께 상승하므로, 농업의 채산성이 불리해진다.
이 같은 공산물가격과 농산물가격의 추이를 시계열적(時系列的)으로 그래프로 나타냈을 때, 두 선이 교차한 다음 차차 가위 모양으로 벌어지는 형태를 취하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이영조 (시장경제와민주주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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