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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누구인가 내 멱살을 잡고 내 몸을 흔들어 댄다면 나는 틀림없이 이에 화를 내며 저항할 것이다. 하지만 선동가가 세 치 혀로 마음을 마구 흔들어 대도 사람들은 이에 저항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연극 '기사들, Knights'에 나오는 장면처럼 '목줄에 매인 개'가 되어 끌려다닐 뿐이다. 자신이 선동정치에 휘둘리고 있음을 미처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선동정치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깨우쳐 주어야 한다. 다음에 열거한 '선동정치의 일곱 가지 특징'이 참고가 되었으면 한다.
첫째, 선동정치는 공포, 혐오, 죽음, 연민, 증오, 분노 등 이용 가능한 모든 감정을 자극하여 민심을 뒤흔들어 행동에 나서도록 만든다. 사람들의 이성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감성을 휘저어 이성적 판단을 마비시킨다. 실례로 우리가 잘 아는 광우병 선동은 사람들의 공포심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둘째, 선동정치는 흔히 거짓과 조작에 기반한다. 선동정치의 가장 효과적 수단은 거짓과 조작이다. 중요한 것은 거짓과 사실을 뒤섞는다는 점이다. 거짓의 조각들을 진실의 실로 꿰매 사실로 둔갑시킨다. 그 결과, 교묘한 선동일수록 대중들은 거짓을 사실이라고 믿는다.
셋째, 선동정치는 편가르기 정치를 먹고 자란다. 거짓 선동을 하더라도 우리 편은 무조건 믿어주기 때문이다. 거짓 선동을 하는 사람들은, 상대편이 거짓말쟁이라고 욕을 하든 말든, 가짜뉴스라고 공격하든 말든, 내로남불이라고 비난하든 말든, 내 거짓말을 무조건 믿어주는 내 편이 있는 한, 걱정할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편가르기 정치가 극심할수록 선동정치가 판을 치게 되는 것이다.
넷째, 모든 지진에는 진앙(震央), 즉 진원지(震源地)가 있는 것처럼 모든 정치 선동에는 그 사령탑이 있다. 저절로 발생하는 유언비어나 루머, 괴담 또는 가짜뉴스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정치 선동은 우연한 현상이 아니다, 조직적으로, 계획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더 무섭다.
다섯째, 선동정치의 특징은 본래의 목표를 은폐한다. 숨은 목적이 따로 있다. 내부자의 증언에 따르면 광우병 선동의 목적은 국민의 건강이 아니라 이명박 당시 대통령의 퇴진이었다고 한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계엄선동, 탄핵선동 또한 마찬가지이다. 숨겨진 다른 목적이 있을 것이다. 두고 보면 알 일이다.
여섯째, 선동정치는 그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중우정치(衆愚政治, Mobocracy)를 몰고 온다. 선동정치가 옳고 그름에 대한 이성적 판단 능력을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바로 중우정치이다.
일곱째, 선동정치의 마지막 단계는 집단광기(集團狂氣)다. 사람은 감정이 한계점을 넘어서면 발작 증세를 보인다. 군중 속에서 한 사람의 발작은 다른 사람의 발작을 유발한다. 이것이 집단 히스테리(Group Hysteria)이다. 집단광기는 흔히 폭력을 부른다. 히틀러의 나치즘 선동과 모택동 치하의 홍위병 선동이 그 표본이다. 프랑스 혁명 후의 사회 혼란도 마찬가지다.
결론적으로, 선동정치는 편가르기 정치의 토양에서 자라난다. 그러나 자연발생적으로 태어나 저절로 자라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 목적을 가지고 조직적으로 일으키는 것이며, 거짓과 조작에 기초하여 감정을 휘젓는다.
자신들의 목적을 숨긴 채 국민감정을 뒤흔들 수 있는 주제를 선정한다. 가슴에 파고들 메시지를 갈고닦아 국민을 선동한다.
자기들만의 SNS 공간에 모여 들끓는 감정을 충분히 예열한다. 그런 다음, 군중들을 광장으로 불러내 집단광기를 부추긴다. 여기에 누군가 폭력의 방아쇠를 당긴다. 누구도 사태를 걷잡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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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그림은 1789년 프랑스 혁명 당시 집단광기에 빠진 군중들이 폭력을 휘두르는 장면이다. 이것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낳았던가?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벌어진 야만의 극치가 아니었던가? 이것은 오래전 남의 나라 이야기만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특히 11월의 광화문 광장은 더욱 위험하다. 자연발생적으로 벌어질 수도 있고, 누구인가 이를 부추기거나 일부러 촉발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 모두 두 눈 부릅뜨고 이것을 경계해야 한다. 11월의 광화문에서 맑게 개인 파란 가을 하늘을 보고 싶다.
한상율 (전 국세청장)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