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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국가의 출현, 제국적 통합으로 나아가는 첫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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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4. 11. 24. 17:21

외계인에 들려주는 지구인의 세계사 <18회>
사르곤의 승전비
아카드 제국 황제 사르곤의 승전비 일부 조각. 한 군인이 포로들을 끌고 가고 있는 모습을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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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윤(맥마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
기원전 4000년경에서 기원전 1200년경까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중국, 인도,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 등 여러 지역에서 도시(city)들이 생겨나서 장시간 번창했다. 도시의 형성과 발전은 지구인의 역사에서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획기적 사건이었다. 우선 도시 생활은 소규모 마을 단위의 삶과는 달랐다. 개개인은 협소한 친족의 울타리를 넘어 익명의 타인과 상호작용했다. 모두가 이득을 보는 '윈-윈'의 공동체적 협업도 가능해졌지만, 사회적 갈등이 증폭됐고, 전염병의 유행도 심해졌다. 갈등을 조정하고 환경을 정비하기 위해선 정부가 필요했으므로 도시들은 머잖아 도시국가(city-state)로 발전했다.

◇도시의 탄생과 도시인의 출현

고대 그리스나 로마 등의 기록을 보면, 도시를 찬양하는 대목이 다수 보인다. 당시의 엘리트는 도시는 불편하고 뒤떨어진 시골과는 달리 합리적 대화와 시민적 자치와 안락한 생활이 펼쳐지는 문명의 중심지라 인식했다. 반면 도시를 도적 떼의 소굴이며, 폭군의 독무대로 나쁘게 그리는 문장도 심심찮게 보이는데, 도시화가 상당히 진행되면서 고질적인 사회적 병폐가 나타났음을 방증한다.

현대인의 머릿속에는 '문명화=도시화'와 '도시화=근대화'라는 두 가지 등식이 입력돼 있지만, 도시의 자격 요건이 애매하다. 인류 최고(最古)의 마을 차탈회위크(Catalhoyuk)에는 많게는 7000명이 모여 살았다고 하나 학자들은 그곳을 도시라 부르길 꺼린다. 오늘날 여러 나라엔 인구 3000 명 이하의 작은 도시들도 많음에도. 독립적 도시국가로 존재하는 바티칸시의 인구는 고작 800여 명이다. 바티칸시가 도시라면 최대 7000명 인구의 차탈회위크는 왜 도시가 아닌가? 대체 도시란 무엇인가? 도시의 가장 본질적 특성은 무엇인가?
◇몇 개의 마을이 모여야 도시가 될까?

통상적으로 현대국가는 행정의 편의상 인간 공동체를 규모에 따라 마을(village), 읍(邑, town), 면(面, county), 군(郡, prefecture) 등으로 구분하나 과연 어디서부터 도시라 부를지에 관해선 학자마다 견해가 다르다. 고대사 권위자인 뉴욕 대학(New York University)의 노만 여피(Norman Yoffee)에 따르면, 도시는 "상당히 큰 면적에 사회적으로 다양한 꽤 큰 규모의 사람들이 조밀하게 모여서 살아가는 영구적 주거지"이다. "상당히 큰 면적"이나 "꽤 큰 규모" 등의 애매한 언어가 불가피한 이유는 역사상 나타난 도시들이 실로 각양각색이기 때문이다.

인구 규모에선 여러 소도시를 압도하지만 차탈회위크는 사회적 다양성을 결핍하기에 도시라 할 수가 없다. 이후 등장하는 본격적인 도시를 보면, 행정을 담당하는 통치자와 관료층이 출현하고, 아울러 대장장이, 방앗간 주인, 갖바치, 도공, 상인, 마부, 선원 등 다양한 직종의 전문 인력이 독립적으로 도시의 주민을 위해 서비스를 제공한다. 또한 관공서나 종교시설과 같은 대규모의 인상적인 건축물이 세워졌다는 점도 도시의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건축물은 도시 주민 대다수와 유관한 정치적 활동이나 종교적 의식의 센터였다.

한 도시가 거대한 건축물을 세우고 유지할 수 있으려면 당연히 상당한 경제력을 확보해야만 한다. 대부분 도시는 고립된 섬이 아니라 여러 마을과 밀접하게 연결하는 지역 경제의 허브였다. 도시의 주민이 소비하는 먹거리는 주변 농촌에서 조달되었다. 반대로 도시는 주변 농촌에 농기구나 생필품을 공급하는 제조업을 담당했으며, 동시에 원거리 무역의 거점으로서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는 역할을 했다.

제조업과 무역업이 성행하여 한 도시의 경제력이 불어나면 외적이 넘보게 마련. 어떤 도시국가든 지역 안보는 가장 시급한 일이었다. 양질의 군대를 양성하려면 정부의 행정력이 필수적이었다. 경제적 요충지에 사람들이 모이면 도시가 생겨나지만, 도시의 유지·발전을 위해선 반드시 사회 갈등을 조절하고, 도시 환경을 정비하고, 외적의 침입을 막고, 치안을 유지할 수 있는 효율적 행정망을 갖춘 정부 조직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자연스럽게 생겨난 도시들은 머잖아 인위적인 정부 조직을 갖춘 도시국가로 발전했다.

아카드 제국의 군인들
아카드 제국 군인들이 적군을 도륙하는 모습의 승전비 일부 조각.
◇ 도시국가들 사이의 전쟁,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한국사를 보면, 조선시대 들어서서 전주(全州)와 나주(羅州)라는 도시를 합쳐서 전라도(全羅道)라 불렀고, 경주(慶州)와 상주(尙州)라는 두 도시가 합쳐서 경상도(慶尙道)라 불렀다. 고대의 도시국가도 이와 비슷한 상향적(bottom-up) 형성 과정을 거쳤다고 할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도, 중국, 아메리카 등 세계 각 지역에서 등장한 최초의 정부는 바로 도시국가의 형태를 띠었다. 도시국가의 정부는 성곽에 둘러싸인 도시 그 자체만이 아니라 그 도시를 둘러싼 주변(periphery)을 통치했다. 쉽게 말해 도시국가는 도시뿐만 아니라 주변 농촌까지 포괄하는 지역 단위의 국가였다. 도시국가는 경제적·정치적 중심지인 도시가 인근 지역을 넓게 아울러 통치하는 정부 형태를 이른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선 두 개의 커다란 강물 사이 비옥한 농지를 배경으로 여러 도시국가가 형성되었다. 동남쪽에서 북서쪽으로 오르며 대표적 도시국가를 열거해 보면, 바스라(Basra), 우르(Ur), 우루크(Uruk), 라가스(Lagas), 이신(Isin), 니푸르(Nippur), 키시(Kish), 바빌론(Babylon), 바그다드(Baghdad) 등을 꼽을 수 있다. 도시국가들은 상호 간 원거리 무역을 통해서 경제적 공조(economic coupling)를 이뤘지만, 지역민들은 부족적 정체성이 뚜렷한 데다 경제적 이해득실의 계산이 다 달랐기에 군사적으로 팽팽하게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문명이든 경제적 공생 관계는 어디까지나 군사적 세력균형 위에서만 유지될 수 있다. 어느 한 도시국가가 군사적으로 우위를 점하게 되면 인근 지역을 침략하여 복속하는 사태가 일어나고 만다. 무엇보다 지역 간 왕래가 잦아지고 경제적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교통이 더욱 발달하게 되면 정치적 통합의 요구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 기원전 2800년 메소포타미아의 도시국가들 사이에서는 전쟁이 빈발했다.

수메르의 전설에 따르면, 바빌론 동부에 있던 키시의 왕이 메소포타미아 남부로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고, 길가메시 왕은 키시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우루크를 강력한 국가로 만들었다. 도시국가 사이의 전쟁은 결국 더 큰 규모의 국가 연합체의 형성을 요구했다. 기원전 2350년 이후부터 메소포타미아는 몇몇 강력한 지방 제국의 통제 아래로 들어갔다. 아카디아나 바빌로니아의 셈족들이 일어나서 수메르인들을 압박하는 과정에서 지역 제국들이 등장했다.

메소포타미아 제국은 아카드의 사르곤(Sargon, 기원전 2370~2315년)에 의해서 창건되었다. 키시의 행정가로 경력을 쌓은 사르곤은 기원전 2334년 쿠데타를 일으켜서 수메르 도시국가를 침략했다. 그는 각 도시의 성곽을 차례로 무너뜨리면서 도시국가들을 하나씩 정복해 나간 후, 각 도시국가에 지방관을 파견했다. 중앙 권력을 확대하여 전 지역에 관료행정으로 다스리는 방법이었다. 사르곤은 여러 지역을 병합하여 제국의 체제를 굳건히 확립한 후에도 군사력을 더욱 강화해 침략전쟁을 계속했다. 이후 다른 역사적 사례에서도 잘 드러나지만, 제국 유지의 가장 효율적 방법은 지속적인 군사적 팽창이기 때문이었다.

송재윤(맥마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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