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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서거] ‘대도무문’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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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규희 기자

승인 : 2015. 11. 22. 19:12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금융실명제·518특별법 등 단호한 개혁 실시
IMF 사태, 차남 권력비리 등 오점도
[포토] [YS 서거]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
22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가 마련되어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대한민국 14대 대통령인 김영삼(YS) 전 대통령이 22일 오전 0시 21분 향년 89세로 서거했다. ‘대도무문(大道無門)’을 좌우명으로 삼고 평생을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자유주의를 위해 살아온 삶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1951년 당시 장택상 외무장관이 국회부의장으로 자릴 옮기면서 비서로 발탁돼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1954년 치러진 제 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고향인 경남 거제에 출마했고 27살의 나이로 국회의원이 됐다. 하지만 촉망받던 정치인 김영삼의 정치인생은 순탄치 못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사사오입 개헌’으로 장기집권을 시도하자 김 전 대통령은 반대운동을 펼쳤고, 자유당의 방해로 제 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했다.

이후 김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3선 개헌에 극렬반대하며 민주화투쟁의 상징으로 거듭 태어났다. 1972년 박 전 대통령의 유신선포에 반대해 가택연금을 당했고 이에 23일간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유신독재의 막바지인 1979년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 전 대통령이 의원직에서 제명당했다. 이 때 남긴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은 아직도 국민의 기억 속에 또렷이 살아있다.
박정희 정권이 끝났지만 12·12사태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은 1985년 5월 또다시 김 전 대통령을 상도동 자택에 연금 조치했다. 김 전 대통령은 단식투쟁으로 신군부 정권에 저항했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대한민국은 대통령직선제를 이끌어냈으나 김 전 대통령은 야권후보 단일화에 실패하며 대통령 선거에 패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90년 1월 민주정의당·신민주공화당·통일민주당 등 ‘3당 합당’을 추진한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시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을 남겼지만 이 3당 합당은 ‘야합’이라는 비판도 받고 있다. 이로써 김 전 대통령은 14대 대통령 선거에서 정치적 라이벌 김대중 전 대통령을 193만표 차로 제치며 대통령에 당선됐다.

문민정부 시대를 연 김 전 대통령은 개혁을 단행한다. 각종 금융비리와 정경유착의 해결을 위해 1993년 8월 12일 ‘금융실명제’를 단행한다. 또한 김 전 대통령자신의 재산을 공개하며 공직자 재산 공개를 확대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5·18 특별법 제정은 독재청산과 역사바로잡기를 위한 개혁이었다. 이로 인해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이 구속 기소되는 헌정 사상 유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또한 군부의 사조직 ‘하나회’를 척결하는 개혁을 단행했다. 당시 떨어진 별(군 계급에서 ‘장’에 해당)이 50개였으니 개혁의 강도가 얼마나 셌는지 가늠할 수 있다.

이러한 개혁으로 김 전 대통령의 지지율은 집권 초 90%를 육박하기도 했다. 하지만 부패사건이 연이어 드러나면서 국민은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1997년 한보사태가 터지고 김 전대통령의 차남 김현철 씨가 뇌물수수 및 권력남용 혐의로 체포됐다.

김 전 대통령의 가장 큰 오점은 1997년 12월 ‘국제통화기금(IMF)사태’다. 당시 기업은 연쇄도산하고 외환 보유액은 급감했으며 수많은 실업자로 대한민국은 6·25 국난 이후 최대의 위기를 겪었다.
조규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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